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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26 도쿄 6일차 - 요코스카

260303

예상대로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지만, 그래도 폭우처럼 쏟아지지는 않아 돌아다니기엔 큰 불편은 없을 듯했다. 오늘은 요코하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요코스카로 향했다. 미 해군기지가 있는 군항도시로, 여러 군함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투어가 있다고 했다. 해군 출신인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요코스카로 가는 길에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던 식당, 스기타야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이에케이 라멘의 원조인 요시무라야의 직계 제자가 운영하는 집으로,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며 더 유명해진 곳이다. 나 역시 그 영상을 보고 방문을 결심했다.

비 오는 날 오전 열 시였는데도 10분 정도 웨이팅이 있었다. 줄을 서기 전에 자판기에서 먼저 주문을 하고, 나온 플라스틱 식권을 입장 후 직원에게 건네는 방식이다. 나는 차슈멘에 시금치 추가, 그리고 밥을 주문했다. 면 익힘, 염도, 기름의 양을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늘 카타후츠후츠(면 딱딱, 나머지 보통)로 주문한다. 일본 라멘집도 이제 제법 익숙하다.

전부 카운터석이라 라멘을 만드는 과정이 훤히 보였다. 영상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면 털기’ 장면도 실제로 볼 수 있어 괜히 반가웠다.

드디어 마주한 스기타야 라멘. 그릇이 정말 큰데 내용물도 가득 담겨 있어 자리로 옮길 때 괜히 집중하게 됐다. 먼저 국물을 한 숟갈 떠 마셨다. 진한 돈코츠의 깊고 기름진 맛, 그리고 분명 짠데 기분 좋게 짠 맛. 면과 차슈, 시금치까지 모두 훌륭했다. 특히 시금치의 아삭한 식감이 걸쭉한 국물과 대비되어 추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왼쪽 사람은 밥까지 5분 만에 다 먹고 나갔고, 이어서 오른쪽 사람도 자리를 떴다. 나도 빨리 먹는 편인데, 일본 사람들은 거의 삼키는 수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넓게 뻗은 카운터에 혼자 남아 있으니 괜히 속도를 더 내게 됐다. (이곳은 한 자리씩 채우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입장시키는 구조라 묘한 압박감이 있다.) 천천히 먹는 사람에겐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맛이 모든 걸 상쇄한다. 지금까지 먹은 라멘 중 단연 1위. 오로지 이 집 하나 때문에 신스기타역에 내렸는데,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요코스카 군항투어
약 한 시간 동안 배를 타고 군항을 돌며 미국과 일본의 여러 군함을 구경할 수 있다. 참수리급 소형 함정부터 이지스함, 미국 항공모함까지. 비가 와서인지 정박한 배가 유독 많아 오히려 운이 좋은 날이었다. 항공모함은 처음 봤는데, 상상보다 훨씬 거대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일본어 설명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거대한 함선을 눈에 담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엄청나게 큰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
일본 해군의 이지스함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미카사 기념관

군항투어를 마치고 20분 정도 걸어 미카사 기념함으로 향했다. 비에 바람까지 불어 걷기가 쉽지 않았다. 가는 길에 군복을 입은 미 해군들이 많이 보였는데, 일본에 있으면서도 어딘가 미국적인 분위기가 섞여 있는 느낌이 묘하게 신선했다.

요코스카엔 미국 느낌의 가게가 많다

미카사는 약 100년 전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군함으로, 현재는 퇴역 후 박물관처럼 사용되고 있다. 당시의 거포가 그대로 남아 있고, 내부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깔끔했다.

배 안에 있는 작은 신사

전시관에는 러일전쟁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인상 깊었던 문장은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취지의 설명이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과오를 직면하기보다는, 믿고 싶은 서사를 선택해 후대에 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사가 직접적으로 조선을 침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빼앗으며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다. 선미에 걸린 욱일기를 보며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각 나라의 가치관이 보인다. 유럽의 자유분방함, 중동의 종교 중시, 일본의 공동체 의식, 한국의 각자도생.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느껴지는 사진관

요코스카는 해군카레가 유명해 돌아가기 전에 먹으려 했지만, 아침에 먹은 라멘이 좀처럼 소화되지 않아 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대욕장의 노천탕에서 몸을 풀고 잠시 쉬었다가, 저녁으로 돈가스를 먹으러 나갔다.

상로스가스를 주문했는데 1,700엔이라 처음엔 조금 비싸다고 느꼈다. 하지만 한 입 먹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탄탄한 육질의 저항감, 씹을수록 터지는 육즙의 조화가 훌륭했다. 일식 돈가스를 좋아해 종종 먹는데, 서울 망원동 헤키에서 느꼈던 감동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들어갈 땐 웨이팅이 없었지만, 나올 땐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근처 직장인들이 많은 걸 보니 진짜 맛집인 듯했다. 이런 집에서 식사하고 나오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2차로는 수제맥주집에 들렀다. 5종 세트와 1인용 플레이트를 주문했다. 맥주가 정말 맛있었다. 그냥 생맥주에서 두 단계쯤 업그레이드된 느낌.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나도 “이건 좋은 맥주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끌벅적하지 않아 혼자 맥주를 마시며 블로그 글을 쓰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가격은 조금 있었지만, 좋은 술은 제값을 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만, 이런 날씨 속에서 여행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여행지에서 비가 온다고 불평하기보다는, 평소엔 볼 수 없는 색감과 분위기를 만난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젖은 도로 위로 번지는 불빛, 우산 아래로 스며드는 공기, 사람들의 발걸음까지도 맑은 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든다.
난 오늘 비가 와서 오히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