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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정

퇴사 후 일주일

day 1 (월요일)

퇴사 후 맞이한 첫 평일. 알람 없이 눈을 뜨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나? 잠시 침대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다가 일어났다. 오늘부로 회사원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났다. 이제부터 나는 자유다.

그렇다고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괜히 TV를 켜고 뉴스도 보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회사 다닐 땐 그렇게 먹고 싶었던 여유로운 아침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이게 맞나 싶다.

점심쯤 되니 다들 일하고 있을 시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사무실에 내 자리 그대로 있으려나? 누가 내 빈자리를 보고 있을까?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

결론: 출근을 안 한다는 건 좋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day 2 (화요일)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퇴사 기념으로 뭐라도 의미 있는 걸 할까 했지만, 의미 있는 일이란 게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랜만에 예전에 좋아했던 드라마를 정주행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이때 진짜 재밌게 봤었는데!” 하면서 즐겁게 시청했다. 그런데 보다 보니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나보다 훨씬 다이내믹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서글펐다.

주인공은 사랑을 하고, 친구들과 울고 웃고, 일에 치여도 나름 보람을 느끼며 살아간다. 반면, 나는?

아무것도 없다.

결국 마지막 회를 보면서 펑펑 울어버렸다. 감동적이어서 운 건지, 그냥 눈물이 터진 건지 모르겠다.

뭐, 울고 나니 개운하긴 하다. 내일은 좀 더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봐야겠다.

치킨이 땡겨서 시켜 먹었는데, 맛이 없었다. 원래 이런 맛이었나?


day 3 (수요일)

산소에 다녀왔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엄마는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제 나 혼자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묘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온 것 같아서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아빠, 엄마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쳐다 보다 풀잎을 정리하고, 준비해온 꽃을 놓았다.

사실, 말할 거리가 많았다. 직장 얘기, 퇴사 얘기, 요즘 본 드라마 얘기, 저번달에 갔던 여행얘기까지. 하지만 입을 열자니 괜히 목이 메었다.

결국, 그냥 가만히 앉아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비석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으! 추워!!!“라고 했을 텐데.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샀다. 평소처럼 아무 일 없는 듯이.


day 4 (목요일)

치킨이 맛없던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다시 시켰다.

역시나 맛이 없었다. 이번엔 양념으로 시켜볼 걸 그랬나? 아니면 그냥 입맛이 변한 걸까?

확인해볼 방법은 하나다. 내일은 햄버거를 먹어야겠다.


day 5 (금요일)

오늘은 집에서 뒹굴뒹굴했다.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영화 코코를 틀었다. 십 년전에 봤던 영화다. 그리고 예상대로, 영화 후반부에서 눈물이 터졌다.

이불을 덮어쓰고 엉엉 울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사라져도 누군가는 날 기억해줄까? 나는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너무 진지한 생각을 하려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결국,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지금은 이불 속이 가장 안전한 공간 같다.


day 6 (토요일)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 그냥.

액정이 깨졌다. 의외로 시원했다.

이제 연락 올 곳도, 확인할 것도 없다.

대신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핸드폰이 없으니 별 수 없이 다른 걸 해야 했고, 결국 책장 한구석에 있던 오래된 소설책을 꺼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역시 인터넷보다는 책이 낫다. 하지만 핸드폰 없이 살아가는 건 역시 불편하다. 배달 음식을 시킬 수도 없고, 음악도 들을 수 없고.

내일은 뭘 하면서 보내지?


day 7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놀이공원에 갔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갔던 곳.

관람차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가니 놀이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전엔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게 신기했는데, 이제는 그저 평범한 풍경처럼 느껴졌다.

솜사탕을 사서 먹었다. 너무 달았다.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지켜봤다.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창문을 열어놓으니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몇 시에 먹었더라.”

시계를 바라봤다. 분명 저번주 일요일 열두 시 정각이었다. 이제 한 시간 남았다.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깊은 물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처럼, 무겁고 둔해진 감각이 천천히 퍼졌다. 손끝이 저릿했고, 다리에는 힘이 풀렸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어쩐지 크게 들렸다. 몇 분쯤 지났을까. 어쩌면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시간이 느리게 갔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의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눈이 감기지 않는다는 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안 죽나?

혹시 약이 가짜였나? 아니면 뭔가 잘못됐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살고 싶었다.

이제와서야.

하지만 손끝이 점점 차가워졌다. 감각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물속에서 점점 멀어지는 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희미해졌다.

죽기 싫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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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써본 이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재미없는 글을 여기까지 읽은 분이 과연 계실까요? 만약 있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

‘일주일 후에 죽는 약을 먹는다면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 상상에서부터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ChatGPT의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그래도 나만의 작품을 하나 완성했다는 점에서 뿌듯하네요.

혹시 이 글이 괜찮으셨다면, 하트와 댓글 남겨주세요. 하나라도 달린다면 또 다른 이야기를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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